[동이] 제2회 디지털작가상 대상 수상작
이 작품은 신석기시대를 무대로 동이족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이전의 상황을 그린 소설인데,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선사시대 생활상을 꼼꼼히 묘사한 부분들이 흥미롭다. 소설 속 인물들의 성격묘사도 개별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이 작품은 스토리에 박진감이 있고 복선을 깔아놓는 플롯도 독자들을 소설 속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기존 한국소설에서 원시 모계사회에 대한 내용이 거의 없었는데, 이 소설이 미답의 영역을 탐사하는 선구적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갖게 한다.
[심사위원]
이순원(소설가)
이경호(문학 평론가)
권태현(출판평론가)
이현경(영화평론가)
황세연(추리소설가)
동이 서문(序文)
소설 동이는 우리의 직접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이 한반도에 들어오기까지의 여정을 담아낸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동이족의 무대는 신석기시대의 두만강 북쪽 만주 지역이다. 당시의 기후와 생활은 지금 우리가 추측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온화한 기후에 살던 그때의 사람들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털가죽으로 몸을 감싸지도 않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음(短音)으로 의사를 소통하지도 않았다. 그때 이미 식물에서 뽑아낸 섬유를 정교하게 짜내 만든 옷을 입었으며 바구니를 비롯한 각종 생활 공예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다른 지역의 일족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던 동이족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활이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활은 모양부터가 전혀 달랐다. 동력을 발생시키는 활과 그것의 힘을 받아 쏘아지는 화살로 나뉜 생소한 무기는 예전에 없던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네 발로 빠르게 달려 순식간에 멀어지는 짐승들을 쏘아 맞출 수 있는 무기는 오직 활이 유일했다. 두 발의 느린 인간이 네발로 달리는 짐승의 빠른 속도를 제압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불이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발견이었다면 활은 야생과 역사를 구획하는 결정적 도구로 기능했다. 활을 가지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진정한 동이의 역사가 발원하게 되었다.
[ 불곰 일족 ] 중에서
“아주 오랜 옛날에 우리는 말이다.....,”
큰어머니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운율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일족의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모여들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계속 걸어가면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호수가 나오는데, 그 호수를 차고 큰 호수(현재의 바이칼 호수)라고 불렀단다. 우리 불곰 일족은 물론, 주변에 사는 표범과 사자, 호랑이 일족의 고향이었거든,”
그곳은 낙원이었다. 모든 일족은 어머니의 품처럼 풍요하고 평온한 차고 큰 호수의 기슭에 따개비처럼 붙어살았다. 새끼 밴 짐승의 배처럼 탱탱하게 부푼 통발이 자신의 부피보다 훨씬 많은 물고기를 쏟아내었으며, 뼈를 갈아 만든 낚시를 넣을 때마다 팔뚝 크기의 물고기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것처럼 걸려 올랐다고 했다. 기슭에 닿은 펄에는 전사들의 손바닥보다 큰 조개가 그득하게 널린 데다, 숲에는 달콤한 열매들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는 이야기는 맛있는 고기처럼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왜 차고 큰 호수를 떠나게 되었어요? 그렇게 살기 좋은 곳을 말이에요?”
네 살쯤 된 아주 영악해 보이는 계집아이가 똑바로 찌르고 들었다.
“오, ‘가여운 진달래’로구나.”
큰어머니가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은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을 아는 딸의 뜻’이었다. 그 분께서 차고 큰 호수를 떠나야 한다고 하셨거든,”
일족의 여자 가운데서 느닷없이 모든 것을 아는 딸이 출현했다. 열흘이 넘도록 큰 병을 앓다가 일어난 젊은 딸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그 딸은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하늘과 땅에 깃든 신성한 존재들과 연결된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아는 딸이 높은 곳으로 피하라고 말하면 어김없이 홍수가 났으며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다치거나 병든 자들도 일어서게 만들었다고 했다. 어느 날 모든 것을 아는 딸이 어서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외쳤을 때 모두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일족이 일제히 터뜨린 비명에 놀란 물새들이 날아올라 하늘을 가릴 정도라고 했다.
그때 일족은 둘로 갈라졌다. 아무리 모든 것을 아는 딸의 뜻이라고 해도 오래 전 부터 살았던 터전을 버리기 어렵다고 생각한 자들은 짐을 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아는 딸을 따르기로 한 자들이 서둘러 피붙이들과 함께 떠날 때 남기로 한 자들은 팔짱을 끼고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아는 딸이 자신을 따르는 일족을 데리고 떠난 열흘 쯤 후, 서서히 호수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붉은 피가 그득히 물결치는 호수에서는 아무것도 살지 못했다. 떠나지 않은 일족은 모두 죽었고 모든 것을 아는 딸을 따라 떠난 약간의 일족만 살아남아 여기에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그 분을 따라 여기에 정착한 다음 우리는 스스로를 불곰 일족이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이 부근에 무서운 불곰이 많았는데 모두 물리쳤거든, 지금 살고 있는 동굴들도 옛날의 아버지와 아들들이 불곰들과 싸워 빼앗은 것이란다.”
“그런데 왜 모든 것을 아는 딸은 나타나지 않는 거죠?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거라고 그러셨잖아요?”
가여운 진달래가 따지듯 물었다.
“그것은 말이다,”
큰어머니가 가여운 진달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직은 그 분의 도움이 필요 없기 때문일 게다. 우리가 정말 어렵게 되면 모든 것을 아는 딸께서 다시 나타나 이끄시겠지,”
다른 아이들은 믿었지만 가여운 진달래는 도리질 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예 가여운 진달래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아이는 태어난 날부터 홀로였다. 태어나던 날 사냥을 나갔던 아비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고 어미마저 그날을 넘기지 못했다. 큰어머니가 일족의 어미들에게 젖을 나누어주게 하고 다른 아이들과 차별 없이 돌보아주지 않았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계속)